여유당 동양학/술수학

유가의 수양론

청화거사 2013. 10. 9. 19:47

  『書經』에서 修養은 하늘의 덕을 자기 몸에 체현하여 天命에 대응하는 天子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天子의 지위나 정치를 얻을 수 없었던 孔子가 이것을 개개인의 내면적인 것으로 끌어내리면서 天子의 德과 修養이 일반인에게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래서 『大學』에서는 이것을 "天子로부터 庶人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모두 修身으로 근본을 삼는다"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孔子는 수양을 강조하며 이를 배움이라고 불렀다. 그는 학문의 의미를 일상적인 衣食住생활 속에서 聖人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한 과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修養論이 체계화된 것은 宋代의 性理學에서인데, 孔子가 말한 ‘敬’을 重要視했다. 修養과 학문의 내용은 『近思錄』에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이는데『近思錄』을 일관하는 것은 ‘居敬窮理’이다. ‘居敬窮理’는 程朱學에서 말하는 학문을 수양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居敬’은 內的 수양방법이며 이는 마음을 성찰하여 성실하게 起居動作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窮理’는 ‘居敬’과는 달리 외적수양 방법으로 널리 사물의 이치를 窮究해서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天理를 保存하고 人慾을 제거한다"는 것으로서 ‘居敬窮理’에 기초한 수양으로 人慾·物慾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적인 악의 상태로부터 본래의 완전함에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수양의 방법에 대해 『周易』에서는 “하늘의 理致와 사람의 본성을 모두 깊이 硏究 하여 天命을 실천한다.”  라고 하여 ‘窮理盡性’으로서 命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天命과 天道에 합치하며 거기에 따르는 생활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中庸』에서는 수양의 길은 誠을 생각하고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復性, 復初라고 했는데, 이는 현실의 인생이 인욕과 물욕에 가려져 天理·天道를 벗어나고 있으므로 그 본래의 모습인 천리·천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孔子에게 그것은 선왕의 ‘禮’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 즉 ‘敬’이었다. ‘敬’이란 마음을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어떠한 정황을 막론하고 用敬할 수 있다면 마음에는 반드시 이러한 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敬하게 되면 心은 곧 한 군데로 집중하게 되고, 마음이 항상 흐트러지지 않고 맑게 되면 점차로 人欲을 누르고 억제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朱熹는 궁리의 방법으로는 聖賢의 글을 읽을 것과 敬의 방법으로는 靜坐를 권유하였다. 


  朱熹는 修養論에서 정이의 공부 방법을 기본 골격을 삼았다. 따라서 그는 인간 속에 주어져 있는 천리로서의 본성을 자각하고 함양하는 일 뿐만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 천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기질의 혼탁으로 일상의 행위들에서 빚어지는 私慾의 폐단들을 제거하기 위한 공부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孟子는 그것을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마음 [不忍人之心], 四端을 깨달아 擴充시키는 것이며 擴充은 우리의 本心인 ‘仁義禮智’에서 ‘四端之心’을 실마리로 해서 擴充하면서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盡心. 存心에 의해 자기의 내면에 돌아와서 본래의 성품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浩然之氣’는 천지간에나 우리 마음속에 가득찬 ‘浩然之氣’를 기른다는 것이다. 이 浩然之氣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것이니 그 기운을 그대로 잘 直養해서 상함이 없게하여 천지간에 가득 찬 본심을 마음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孟子의 수양 이론의 목표는 타고난 도덕 성향을 잘 배양함으로써 완전한 도덕 성향을 성취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타고난 도덕 성향인 四端을 가지고 있는데 四端의 배양은 반성적 思惟를 통해 가능하다. 孟子의 수양이론에서 핵심은 마음의 반성적 사유기능 또한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天之所與我者)이라고 주장된다. 따라서 孟子는 마음을 보존하고 성을 기르는 것[存心養性]은 하늘을 섬기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修養論을 심화시킨 사람은 王陽明이다. 그의 언행록인 『傳習錄』에서는 천리를 보존하고 人慾을 제거하는 공부를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다. '傳習'이란 말은 傳受받은 것을 열심히 익힌다는 뜻이니 배웠으면 實踐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知行合一, ‘致良知’등을 논하고 있다. 또 생각 자체가 이미 行이니 생각에도 옳지 못한 나쁜 것이 깃들이지 않도록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存天理, 去人欲'이 학문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으로써 立志라 했다. 따라서 자기의 私慾을 억제하는 克己工夫를 하지 않고 종일토록 입이 앞서는 학문을 할 것 같으면 무익하고 실용성이 없는 空言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호는 修養論에서 기질에 의한 장애를 변화시키기 위한 규범적 훈련보다 만물과 일체를 이루는 원천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본성을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 李滉은 朱熹와 같이 ‘居敬窮理’를 修養의 요체로 삼았다. 그는『天命圖說』에서 인간의 본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하고, 모든 사람은 본연지성을 가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으로는 기질의 맑고 흐림에 따라 사람마다 차이가 생겨 上智· 中愚· 下愚가 생긴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이 날 때에 하늘에서 氣를 받았으니 하늘의 기운은 맑은 것도 있고 탁한 것도 있고, 땅에서 質을 받았으니 땅의 질은 순수한 것도 있고, 박잡한 것도 있다. 그러므로 그 맑고 순수한 것을 타고난 자는 上智가 되니, 상지는 하늘의 이치에 대해 이미 분명히 알고 극진하게 행하므로, 자연히 하늘과 함께 합한다. 맑되 박잡하거나, 탁하되 순수함을 타고난 자는 中人이 되니, 중인은 하늘의 이치에 대해, 하나는 智는 남음이 있으나 행이 부족하고, 하나는 지는 부족함이 있으나 행이 남음이 있어서, 비로소 하늘에 합한 것도 있고 어긴 것도 있다. 그 탁하고 박잡함을 얻은 것은 下愚가 되니, 하우는 하늘의 이치를 아는 것이 이미 어둡고 행하는 것이 또 간사하여 멀리 하늘과는 어그러진다. 이것이 사람이 타고난 것에 대체로 세 등급이 있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下愚일지라도 다 아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아무리 上智일지라도 모르는 바가 있는 것이니, 대체로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보지 못한 일은 알기 어려운 것이 있으므로, 반드시 아는 자만이 알 뿐이다. 여기서 중인·하우를 기질의 변화에 의해 상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그 修養論의 요점이었다.


  그는 천리의 보존과 인욕의 억제를 통해 公과 義를 추구하고 私와 利를 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居敬’을 道學의 요점이라 했으며, 성현의 모든 가르침이 敬 한 글자로 요약 된다고 했다. 한편 李珥는 『擊蒙要訣』『學校模範』에서 그의 修養論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안으로는 存心窮理를, 밖으로는 格物致知를 주장했다. 그는 『答成浩原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성인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感함이 없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은 없다. 반드시 감함(느낌)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감하는 것은 다 밖의 外物이다. 어버이에 감하면 孝의 마음이 움직이고, 임금에 감하면 忠의 마음이 움직이고, 형에 감하면 공경의 마음이 움직인다. 어버이며, 임금이며, 형이며 하는 것이 어찌 내 속에 있는 이치이겠는가? 천하에 어찌 감함이 없이 속으로부터 절로 발하는 정이 있을 수 있는가? 이제 만약 外感을 기다리지 않고 속에서 自發하는 것을 四端이라 한다면 이것은 아버지 없이 효의 마음이 발하고, 임금이 없이 충의 마음이 발하고, 형이 없이 공경의 마음이 발하는 것이니 이 어찌 사람의 실정이겠는가?”

  氣를 본연의 氣와 본연이 아닌 氣로 구분하고, 修養을 통해 각 개인이 자신의 氣를 다스려 본연의 氣, 즉 ‘浩然之氣’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유학은 중국이나 조선이나 하나같이 인생최고 수양에 대한 한 가지 원칙에는 바로 樂天知命이다. 樂天이란 하늘의 법칙을 알고 자연에 합하는 것이다. 知命이란 생명의 이치로 생명의 진리 내지는 자기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사람은 양심을 들어 어긋나게 나아가려는 기호나 욕심에 대해 스스로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스스로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하거나 욕심을 부리면 양심은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마음 안에서 갈등과 번뇌를 일으킨다. 비록 신체의 양생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그 인격의 수양에 해롭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사람은 완벽을 갖춘 사람은 드물고 학문의 노력과 수양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으로 군자가 되는 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자료인용, 서준원박사, 명리학적수양론, 동양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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