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사』는 초(楚)나라의 가사(歌辭)라는 뜻이다. 『초사』의 작자로는 굴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초사』의 창시자이면서 가장 중요한 작가이다. 『초사』에는 여러 편의 글들이 적혀 있으나 학계의 연구로 여러 작품 중 「이소(離騷)」, 「구가(九歌)」, 「천문(天問)」, 「구장(九章)」 등의 글들이 순수한 굴원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인호 교수는 『무(巫)의 중국문학』에서 “「이소」는
『초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고, 또한 굴원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이에 「이소」의 완전한 이해는 『초사』의 완전한 이해와도 통한다.”고 하였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초사』에 대하여 “중국 시가(詩歌)의 총집이고 전국시대 이전에 초나라 땅에서 발생한 운문(韻文)으로 무당(巫堂)이 신전(神殿)에 바치던 말이 그 원형(原形)이다”고 하며, 또한 그는 “고대 중국을 움직인 5대 부족국가로 남족(南族/苗族)은 허난성{하남성(河南省)} 서남부에서 무한(武漢) 일대 한수(漢水 유역에 걸쳐 처음으로 수경경작(水耕耕作)을 한 부족으로서 용감하고 강인했으며, 전쟁에 나가거나 제사를 지낼 때면 남{동고(銅鼓)}이라고 하는 특유의 악기를 연주했다”고 했다. 굴가령(屈家嶺) 문화권이면서 은(殷)나라와 강(羌)나라에 쫓겨 서서히 남하(南下)했고, 훗날 이 지역에는 초나라가 진출했다고 하였다.
굴원의 작품에서는 무(巫)와 관련 초나라의 풍습이 많이 보인다. 『초사』 「구가(九歌)」에서 왕일(王逸)이 붙인 서문(序文)에 “옛날 초나라 남영 고을인 완수(浣水)· 상수(湘水) 사이에 사는 사람들은 영혼(靈魂/鬼神)이 있다고 믿고 제사(祭祀) 지내기를 좋아했으며, 그 제사에는 반드시 무당들에게 음악을 연주시켰고 가무(歌舞)로써 신(神)들을 즐겁게 했다.” 이러한 초나라의 풍습을 이해하면서 「이소」에 나타난 역학적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帝高陽之苗裔兮 제고양(帝高陽)의 후예(後裔)로
朕皇考曰伯庸 나의 선친은 백용(伯庸)이라고 불리었습니다.
攝提貞于孟陬兮 섭제격(攝提格)의 해 바로 첫 정월 달
惟庚寅吾以降 경인(庚寅)날에 나로 하여금 내려가게 했습니다.
皇覽揆余初度兮 선친께서 나의 첫 법도를 살피시고,
肇錫余以嘉名 일찍이 나에게 좋은 이름을 내려 주었습니다.
名余曰正則兮 나를 이름 하여 정칙(正則)이라고 하시고,
字余曰靈均 나에게 자(字)를 붙여 영균(靈均)이라고 하셨습니다.
위에 인용된 글에서 굴원은 자신의 계보(系譜)를 적고 있다. 중국의 금문학자(金文學者) 낙빈기(駱賓基)는 금문(金文)을 근거로 한국, 중국, 일본은 모두 동이족(東夷族)의 후손(後孫)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굴원의 가계(家系)는 전욱고양(顓頊高陽)의 자손(子孫)이라는 뜻이 되며 고조선(古朝鮮)의 혈통(血統)으로도 볼 수 있다.
금문(金文)이란 은상(殷商)‧ 양주(兩周)와 진한(秦漢) 시기의 청동기(靑銅器) 위에 새겨진 문자를 가리키며, 금속(金屬)을 총칭하여 ‘금(金)’이라 한다. 청동기(靑銅器)는 그 용도에 따라 예기(禮器)와 악기(樂器)로 나눌 수 있다. “솥{정(鼎)}이 예기(禮器)를 대표하고, 종(鐘)이 악기(樂器)를 대표할 수 있다”고 정의(定義)하는데, 『금문의 비밀』에 수록된 정의는 위와 조금 다르다. ‘금문(金文)’이란 역사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나무류와 동물의 껍질, 뼈다귀, 돌, 금속에 새겨진 글자를 총칭한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낙빈기가 해독한, 4500년 전 중국의 삼황오제시대에 사용되었던 청동(靑銅)으로 만든 각종 농기구(農器具)와 병장기(兵仗器), 또 그 시대에 통용된 돈(화폐), 사당(祠堂)에서 사용되던 각종 제기(祭器) 등에 새겨진 글자들을 총칭해 금문이라고 했다.
굴원이 자신의 혈통(血統)을 자랑한 듯 보이는 이런 문장들로 인해 ‘굴원이 제 몸 추듯’ 한다는 속담(俗談)이 있지만 전욱고양(顓頊高陽)의 후손이라면 굴원은 초나라가 지금은 중국의 지명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그가 태어난 섭제격(攝提格)은 목성(木星)이 인(寅) 방향으로 온 해이며, 인월(寅月)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자루가 인(寅) 방향에 있을 때이다. 하(夏)나라 역(曆)에 인월(寅月)을 정월(正月)로 삼았던 기록이며 또한 사주명리로 나타내면 경인년(庚寅年), 경인월(庚寅月), 경인일(庚寅日)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정칙(正則)이란 이름과 자(字)를 영균(靈均)이라 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가계가 정인집단을 상징하는 의미가 숨어 있다. 정인집단이라 하면 은나라 시대 제정일치의 표본인 왕(王)은 제사장(祭司長)의 우두머리였고, 하늘에 제사하고 점을 칠 때 왕과 함께 참여한 무(巫)와 정인이 왕(王)의 점복에 참여하고 주관하였다. 영(靈)이란 무당(巫堂)이라는 뜻도 된다.
김인호는 『사기(史記)』의 「굴원열전(屈原列傳)」을 통하여 굴원이 맡은 삼려대부(三閭大夫)의 직함에 대하여 족장(族長)들의 대부(大夫)이며 왕(王)과 국사(國事)를 도모하는 왕(王)의 자문위원(諮問委員)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왕일(王逸)의 주(註)를 인용하여 굴원의 명(名) 정칙(正則)의 ‘정(正)’은 평(平), ‘칙(則)’은 법(法)이며, 영균(靈均)의 ‘영(靈)’은 신(神)이고, ‘균(均)’은 조(調)를 뜻하여 정칙(正則)과 영균(靈均)은 바르고 곧으며 신령스럽고 가지런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무집단(巫集團)과 연관 지었다.
류종목 외 3인은 “왕일(王逸)의 주(註)에서 ‘평(平)’자는 정평법칙(正平法則)의 뜻이고, ‘원(原)’자는 양물조균(養物均調)의 뜻으로 정칙(正則)과 영균(靈均)은 평(平)‧원(原)과 각각 같은 뜻이다”고 하였다. 무(巫)의 혈통(血統)이란 은대(殷代) 갑골(甲骨)로 점단할 때 신탁(神卓)과 신의(神意)를 갑골(甲骨)에 적은 글을 복사(卜辭)라 하는데 왕(王)과 무(巫)와 정인이 같이 주관하고 참여하였다. 대부분 무(巫)과 정인을 나누는데 통틀어 무(巫)로 보고, 『초사』 또한 무가(巫歌)로 분류하고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왕(王)이 참여하지 않은 제사를 인정치 않고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전형으로 보고 후(後)에 무(巫)는 도태(淘汰)된다. 전국시대( 굴원 또한 제정일치사회에서나 그 가계가 인정을 받지만 주(周)나라의 봉건주의 제도로 바뀌면 정인집단도 도태되게 된다. 그러나 봉건주의시대에도 거북점과 시초점이 같이 쓰이고 군주제(君主制)로 이행되면서 정인집단은 설 곳이 없어진다.
굴원이 처음에는 회왕(懷王)의 사랑을 받게 되고, 신하들의 질시(嫉視)와 음해(陰害)로 회왕이 굴원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인해 나라가 위험에 빠지고 회왕이 죽는다. 또한 경양왕(頃襄王)이 굴원을 귀양(歸養) 보내게 되는 과정에서 떠돌던 굴원이 자살하였다고는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초나라 또한 무(巫)나 정인이 갑골(甲骨)로 점단하는 것보다는 시초점‧서점(筮占)이 유행하게 된다.
거북점단에서 거북이 감소되고 그보다는 『역경』을 통해 점사(占辭)를 읽고 판단하였다는 과도기에서 정인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소」에서 더 이상 갑골(甲骨)로 점단(占斷)하지 않았다는 단서들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索藑茅以筳篿兮 경모초(藑茅草) 구하여 점대를 만들어
命靈氛為余占之 영분(靈氛)더러 나를 위해서 점치게 하니
경모초(藑茅草)가 어떤 풀인지 정확하게 찾을 수는 없지만 일종의 영초(靈草)로 붉은 꽃이 핀다고 한다. 정전(筳篿)이란 둥글고 가는 댓가지로 만든 점대, 정(筳)은 가는 대{소죽(小竹)} 또는 대쪽{죽편(竹片)}이고, 초나라 사람들은 갈대나 댓가지로 점(占)을 치는데 이러한 점(占)을 전(篿)이라 한다. 영분(靈芬)은 길흉(吉凶)을 점치는 사람으로 영(靈)은 무당(巫堂)을 뜻하고, 분(芬)은 그 무당(巫堂)의 이름이라고 한다.(자료발췌 : 이시송, 단오의 역학적 함의 연구, 동양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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