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 명리학/전문과정

한국 명리학의 역사

청화거사 2013. 5. 24. 12:55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국시대부터 陰陽관념이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고려조에 와서는 천문기상과 관련된 五行관념이 등장하여 政事에 반영하였음을 각각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특히 司天大博士를 지내고 육진병법의 대가였던 통일신라의 김암(金巖)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음양가의 술법을 배운뒤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이라는 기문둔갑서(奇門遁甲書)를 지어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孝昭王 원년(692)에 고승 道證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天文圖를 바쳤다는 기록과 신라말에 道詵에 들어가서 一行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秘記를 지어 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음양오행의 天文 地理 人事上 응용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론의 인사적 응용으로서 기문둔갑이 사람의 운명을 추단한다하여 사주명리학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중국의 정통 기문둔갑의 이론체계가 局數를 기본으로 卦位, 九宮方位, 九干, 九星天文入門, 八神 등 이론의 구성자체가 다르고 명리학과 같이 사람의 생년월일시의 사주에 근거하지 않고 布局하는 출 연월일시가 기준으로 된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론 고려사에도 사주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은 당시의 기문둔갑이 사주와 무관한 이론체계였다는 것으로 추리하게 한다. 다만 간지를 비롯한 방위 등 관련요소에 근거하여 사람의 성정을 비롯한 제반사를 예측하는 운명학이라는 점에서 기본적 공통성을 지닌다.  


사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발견된다. 즉 태종의 모친인 신의왕후 韓氏는 아들인 태종의 장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당시의 卜者 文成允에게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에게 경솔하게 물어보지 마소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이 기록상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주에 관한 기록이다. 이때가 태종 11401년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 사주명리학이 전래된 시기는 늦어도 이보다 12백년 전의 고려말 1213세기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제도상으로는 1392(태조 1)八宮補吏法이 제정되어 태조 때 당초에 음양과가 설립될 때에는 과거제도의 雜科天文學, 地理學과 함께 命科學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陰陽科가 설치되어 분야별 인재 등용시험으로 기능하였다.  


음양과는 1466(세조 12) 명과학으로 이름을 고쳐진다. 시험은 관상감(觀象監)에서 관장하고 다른 잡과와 마찬가지로 式年試增廣試에만 시행되었는데 初試覆試로 나뉘어 실시하였다. 초시는 上式年 가을에 관상감에서 실시하였고 복시는 관상감이 예조와 함께 시행하였다. 그 선발인원수는 初試에 명과학이 4명이었고, 천문학, 지리학이 각각 10, 4명이었고 覆試에서는 명과학 2, 천문학 5, 지리학 2명이었다. 명과학의 시험과목으로는 원천강, 서자평, 응천가(應天歌), 범위수(範圍數), 극택통서(剋擇通書), 경국대전 이었는데 원천강은 배강(背講)하게 하였고, 나머지 5책은 임문고강(臨文考講)하게 하였다합격자는 예조인(禮曹印)이 찍힌 백패(白牌)가 주어졌다. 천문학, 지리학과 함께 명과학 합격자는 일단 관상감에 배속되었는데 1등은 종8품계, 2등은 정9품계, 3등은 종9품계를 받았으며, 이미 품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2품계에서 1품계를 올려주었다.


1474년 성종5년에 일시적으로 폐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조 500년간 내내 과거시험에서 음양과 또는 명과학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조선조에서 명리학의 위치는 같은 잡과에 소속된 천문학, 지리학과 동일선상에 상당한 학문적 인정을 받았던 명실공히 제도권 학문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실정과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시사한 바가 적지 않다. 실제로 조선 초기부터 왕족 또는 조정 대신들이 수시로 사주를 보았다는 관련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은 이와 같은 제도적으로 인정된 배경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명리학은 조선조 500년간에 걸쳐 그 순기능과 함께 역기능도 하게 된다. 왕조의권력주체를 교체하려는 반역 모의사건의 배후원인으로 기능하여 관련 당사자가 중죄자로 처형당하는 사례도 여러번 등장하였으나 이는 명리학의 역기능적인 모습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순기능으로 보나 역기능으로 보나 조선조 500년사에 명리학의 비중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학자로는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 있어 토정비결(土亭秘訣)과 월영도(月影圖)를 지었다 하나 진정한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명나라 장남의 명리정종의 내용에 저자의 내용을 첨부하여 간행한 저자미상의 조선판 명리정종 한권이 전해진다. 이책은 오행론과 통변성 위주의 내용인데 내용이 상당히 산만하다. 서문과 출간년도 등 서지사항도 없어 조선조 언제, 누가 지은 책인지 알 수 없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민족 정체성과 민족정기 말살의 강압통치로 인하여 대부분의 학술분야가 그러하듯이 명리학 또한 특별한 활약상이 없이 지하로 숨어 민간에서나 활동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조선조와 같이 제도상으로는 물론 인정될 수 없었고, 저술활동에 있어서도 눈에 띄는 활약상이 없다. 1919朴健會四柱吉凶自海法博文書館에서 발간된 뒤로는 무려 30여년간 정통 명리학의 명맥을 잇는 저서의 발간을 발견할 수 없다.  


그 뒤 광복 후 1950년대부터 다시 명리학의 연구활동이 움트기 시작하여 1956년 세창서관(世昌書館)에서 사주를 주역 64괘와 관상과 함께 논한 사주복서관상법(四柱卜筮觀相法)이 발간되었다. 한국 명리학의 본격적인 부흥기는 1960년부터 시작된다. 대표적으로 사주의 격국론과 실관요령 등을 종합 정리한 이석영의 사주첩경(四柱捷徑) 6책과 박재완의 명리사전(命理辭典)과 명리요강(命理要綱) 도계실관(陶溪實觀) 등이 지속적으로 애독되는 명리서이다.  


입문서이자 개론서로 白靈觀이 지은 四柱情說40년간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1977년에 발간된 최윤석의 命理學全書는 중국의 정통 명리이론의 다양한 체계를 平易하면서도 간단하게 잘 설명한 개론서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수많은 명리서적이 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더욱 많이 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현재도 우리나라는 물론 대만, 일본에서 사주를 통하여 운명을 감정하는 推命家들이 이론과 실제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인용 : 심규철 박사학위논문, 命理學淵源理論體系에 관한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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