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 동양학/술수학

마의상서(麻衣相書)』

청화거사 2013. 10. 30. 16:31

  필자가 경남 산청군 신등면 내당(內塘)에서 한문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있을 때였다. 두어 살 위인 선배가 “이봐 그렇게 미련스레 『주역(周易)』만 읽어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가? 세상사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야 『주역』이지. 선생님(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1978) 서고에 『마의상서』가 있다는데 선생님께서 잘 빌려주지 않으신다고 하니 재주가 좋은 자네가 가서 빌려 온다면 이번 겨울은 소득이 있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나는 조금 뒤에 보황실(寶璜室 당시 선생님이 거처하시던 곳)로 올라가서 글을 배우고 나서 마의상서 좀 빌려달라고 말씀을 드렸다가 뜻밖에도 큰 꾸중을 들었다. “너는 항상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하더니 그따위 잡서를 읽어서 어디에 쓰려고 시간을 낭비하려 하느냐?”고 하시며 엄한 말씀으로 불허의 뜻을 밝히셨다.

  신고당(信古堂 당시 학생들이 글 읽고 생활하던 곳)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예로부터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한문 공부만 해서는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읽어서 조금 눈을 뜰만 하면 산서(山書)를 읽어서 풍수(風水) 노릇을 하였는데 생활에 보탬이 되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또 오행(五行)을 공부하여 일관(日官)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상서(相書)를 읽어서 관상쟁이가 되기도 하기에, 끝까지 공부하지 못하고 중도에 옆길로 새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선생께서 크게 꾸중을 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필자는 자량(自量)컨대 그럴 위인도 못되고 그럴 턱도 없거니와 이 책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그치지 않아서 몰래 서고에 들어가서 이 책을 찾아내고 말았다. 당판(唐板)으로 5책이라 많은 분량이 아니어서 겨울 한 철이면 완독할 자신이 있었다. 이 책은 서문(序文) 대신 책이 편찬된 내력 같은 글이 서두에 있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송(宋)나라 전약수(錢若水)가 과거 공부에 열중하던 젊은 시절에 화산(華山)에서 마의(麻衣)를 입은 한 도사를 만났다. 이 도사가 전약수를 한참 보더니, “준마를 타고 길을 달려가듯 출세의 길을 거침없이 내딛는 형세요, 솔개가 바람을 타고 하늘에 솟아오르듯 벼슬길에 순탄하게 승진하고 거침없이 발전하는 형상이지만, 그 권세가 급물살을 탈 때에 용감하게 은퇴하는 사람이다. [驊騮開道 鷹隼出風 急流中 勇退之人也]”라고 하였다. 전약수는 과연 벼슬길에 올라 40세에 추밀 부사(樞密副使)가 되고 사람들의 흠앙을 한 몸에 받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벼슬에서 용퇴하였다.


 

  전약수가 벼슬에서 물러난 이유는 신선(神仙)이 되고 싶어서였다. 세상의 영화와 부귀는 모두 겪어보니, 추악한 경쟁과 모함이 난무하는 전쟁터와 비슷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육신이 살아있을 때에 하루속히 이런 곳을 벗어나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신선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은거하고 있는 마의도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어렵사리 찾아간 도사는 머리를 저으며 “골상에 없다[無此等骨]”고 하면서 절구 한 수를 지어주었다. “욕심이 있으면 부족에 허덕이고 욕심이 없으면 근심도 없는 법, 맑게 비운다는 것은 노끈 허리에 매고 삼베옷 걸치는 것이 제일이라네.[有欲苦不足 無欲亦無憂 未若淸虛者 帶索被麻衣]” 이에 전약수는 신선이 되기를 포기하고 관상법을 전수받게 되었다.

눈은 마음의 거울

  필자가 지인의 장례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부자(父子)를 만나서 어린 아들을 보고 물었다.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여 일이 되었겠구나.” 그랬더니 아이도 그 아버지도 놀라면서 “누구신데 어떻게 우리의 사정을 그렇게 아십니까?”라고 되물었다. “지금 이 아이는 해가 지면 무서워서 문밖을 나가지 못할 것이며 며칠 더 있으면 머리를 흔들 것이며 한 달을 그대로 두면 큰 변을 만날 것입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의 시체에 놀라서 병이 생겼습니다.

 

  산에 가서 일명 귀전(鬼箭)이라는 휄립나무의 겉껍질이 비닐처럼 엷게 붙어있는 것을 한 줌 따서 냉수에 넣고 끓여서 사나흘 정도만 복용하면 깨끗하게 낫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더니, 그 아버지가 지금 이 아이 때문에 의원을 찾아가는 길이라면서 두 번 세 번 신기해 하였다. 그래서 다른 의원을 찾아갈 필요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면서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물어왔지만, 사람은 본래 길에서 만나서 길에서 헤어지는 것이라고만 하고 그들을 보냈다. 


  이 아이는 평소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르게, 죽은 어머니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부풀어 오르고 시즙(屍汁)이 흐르는 모습에서 섬뜩한 것을 느꼈을 것이며, 촛불이 가물거리는듯한 김이 서려 있는 방에서 무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정과 또 의리 같은 감정 때문에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갑자기 병 하나를 얻게 되었으며 나중에 장례를 치렀는데도 그 광경이 눈에 어른거려, 해가 지고 나면 무서워서 문밖을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본래 거짓말도 할 수 있고 겉으로 태연한 모습으로 상대를 대할 수도 있지만, 눈동자는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 양심에 부끄러운 가책을 느끼거나 큰 공포감을 느끼게 되면 먼저 환포(環抱 눈둘레 근육)가 변하고 동자가 많이 흔들린다. 시체에 놀란 병을 경시증(驚屍症)이라고 하는데, 이때 환포는 잠이 막 쏟아질 때 억지로 참으며 눈을 뜨려고 하는 모양새로 변한다. 누구나 한 번만 보면 알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80년대를 맞으면서 우리 사회에서 없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가정에서 초상을 치르는 풍속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번은 마산에 사는 친구 김모 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차를 내어 온 처녀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가정부라고 하였다. 얼른 내보내라고 하였더니 이 친구는 건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재차 내보내라고 하고 돌아왔다. 그 후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친구가 전화로 마산에 올 경우 꼭 한번 들르라고 하였다. 그런 전화를 받고 나서 얼마 후에 다시 찾아갔는데 다짜고짜 어떤 여자를 불러서 관상을 보아달라고 청하였다. 이유인즉 지난번에 내가 내보내라는 그 처녀가 집안에 있는 패물 등을 모조리 훔쳐 달아났다면서 그때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에 왜 그 처녀가 도둑이라고 바로 말하지 않았느냐고 불평마저 하기에 이번에는 내가 듣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첫 출근하던 날, 점심 후 산책을 하다가 이상한 눈을 지닌 사람을 만났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무 기사’라고 하였다. 분명한 도목(盜目)이 직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얼마 뒤 어느 일요일에 동편 연못에 키우는 금잉어를 몰래 잡아서 나가다가 정문에서 붙잡혀 쫓겨났다고 들었다. 6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는 소매치기들도 모두 이런 도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눈 역시 환포가 비정상으로 변해 있고 눈의 흑백이 흐리며 사람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특징이 있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 또한 80년대를 지나면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는데, 좋게 변한 우리 사회의 일단면이다.

동상이판(同相異判)

  “남의 밭의 이삭이 크게 보이고 자기 자식의 잘못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但見人穗之碩 不見其子之惡]”는 말이 있다. 인간은 욕심에 가려지면 사물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습성이 있으니, 마음이 끌리는 곳에는 판단도 흐려져 오판을 유발한다. 자유당 독재가 극심할 때인 1956년 쯤이었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대통령에 출마하였다. 자유당의 부정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때인지라 민심이 민주당 쪽으로 기울어 한강 백사장에 백만 군중이 운집하여 해공 선생의 연설을 듣는 실정이었다.

 

  해공 선생의 관상을 보면 입 모양이 사구(蛇口 뱀 입) 상이다. 구렁이는 자기 몸보다 큰 거위 알을 입으로 삼킬 수 있다고 한다. 당시에 거대한 몸집을 지닌 이승만의 자유당은 민심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해공 선생이 자기보다 덩치가 큰 이승만을 이길 것이라고들 염원하고 있었다. 해공의 사구가 소문을 타고 전국에 퍼졌기에 모두 그렇게 기대하며 의심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유당의 지시(指示)에 주구(走狗) 역할을 하던 당시의 경찰들까지도 주춤거리며 시세를 관망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해공의 입이 복주구(覆舟口 배가 뒤집혀진 모양의 입)라고 외치고 나온 김천의 모 경찰서장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그의 부친이 백운학(白雲鶴)에게 관상법을 전수받아 김천 모처에서 철학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부하 직원들을 모아놓고 “배에 사람이 많이 오르면 중류(中流)에서 전복된다. 지금 해공의 인기가 절정에 도달하였으니 그 배는 곧 뒤집힐 것이다. 여러분은 자유당의 승리에 대해 의심하거나 기죽지 말고 선거운동에 한층 더 매진하라.”고 큰소리를 치니, 당시의 민심에 찬물을 끼얹었고 한풀 꺾여 있는 경찰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경찰서장의 평소 관상 실력을 믿는 터라 괜히 하는 농담으로 치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해공 선생의 입 모양을 ‘사구’로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복주구’로 보아서 동상이판의 현상이 일어났다. 선생은 호남지역 유세 길에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당시의 여망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당시의 부정부패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관상학에서 비요(秘要)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비요는 그 사람에게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 원인 같은 것으로서 비결과는 다른데, 이 때문에 오는 불행이나 다행은 십중팔구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예컨대 ‘목이 짧고 머리숱이 많고 해를 보고 걸으면 배우자를 잃는다.[項短髮長向日行喪配]’라는 비요가 있다. 이런 비요를 지닌 사람이 필자의 주변에 세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그 팔자를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끝내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이마가 짧고 코가 크고 다리가 길면 두루마기가 없다.[短顙大鼻長股無深衣]”라는 비요가 있는데, 관상 속담에서 말하는 소위 ‘코꺽다리’이다. 여기에서 ‘두루마기가 없다.’는 것은 마누라가 없다는 뜻인데, 이 경우는 상처(喪妻)가 아니라 불취(不娶)에 해당하는 관상이다. 속담에 ‘소금이 썩는 것을 보았느냐, 코꺽다리가 계집 있는 것을 보았느냐,’라는 말이 있으니 여기에서 불취를 증명할 수 있다.

골상불여심상(骨相不如心相)

  골상불여심상이란 ‘관상(골상)이 아무리 잘 생겼어도 마음을 잘 쓰는 것만 못하다.’라는 뜻으로 마음을 잘못 운용하면 잘 생긴 골상도 나쁜 결말을 부른다는 말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출세하는 이유는 골상에 달려있고 말로에 행불행이 오는 이유는 심상에 원인이 있다.[出世之由因骨相 末路之由因心相]”, “비록 역적으로 죽었으나 뒷날 충신으로 불림은 그 사람의 심상이 그래서이다.[雖以逆死 後世稱忠者 其人之心相然也]” 등이 있다.

 

  심상이란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며 살아온 평생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신고(辛苦)를 언제나 즐겁게 받아들여 초연의 경지에서 <무애(無)>를 작곡하여 구가(謳歌)한 원효(元曉)는 욕계(欲界)를 초탈하는 심상을 지녔기에 원효가 되었을 것이며, 한 때에 역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뒷날 충신으로 이름이 바뀐 사육신들은 그들 평생에 뛰어난 학문과 차원 높은 수양으로 굳은 절개가 엉겨있는 심상 때문이었으리라.

  “아름다운 꽃 아래에서 잠방이를 말린다.[花下曬裩]”라는 구절은 운치를 깨는 행위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골상이 뛰어나서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올랐으면 아름답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 금상첨화이련만, 요즘 몇몇 고위 관직자들의 처신을 보면, 아마도 심상 운용을 잘못하였던지 ‘천지강산무소지(天地江山無所之)’의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이런 모습은 보기에도 딱하고 안타까운 것이, 아름다운 꽃 아래에서 잠방이를 말리는 것처럼 좋은 세상에 운치를 깨고 만다. 골상이 불여심상이로다! 골상이 불여심상이로다!

글쓴이 : 노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