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중요성
고전이 중요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이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왜 지금 나는 새삼 말하려 하는가? 고전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세상은 그 중요성을 생활의 도(道)로서 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알음알이로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라는 것이다.
알음알이라는 말은 불교의 용어로 여기서 잠시 빌린 말이다. 알음알이라는 것은 개념적 정보의 수준을 일컫는다. 요사이 세상은 정보통신의 발전과 다양화로 엄청난 양의 정보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고전도 그 정보자료의 하나가 되어 무수히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고전은 그렇게 정보통신으로 전달될 수 있는 정보자료가 아니다. 고전이 만약에 그런 의미의 정보통신 자료가 된다면, 고전은 쉽게 암호로 요약되어 -다이제스트화 되어- 캡슐 속에 용해되리라.
단적으로 말하면 고전은 하나의 도(道)에 속한다. 도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고전은 결코 고전이 될 수 없다. 도는 이를테면 하나의 길에 속한다. 한자로 도(道)가 길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도를 길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그런 일상적인 길, 물리적인 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가 길인 것은 확실하나, 모든 길이 다 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도는 길보다 의미가 더 깊고 아득하다. 그리고 도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다니기에 생긴 것이지만, 맹자의 말처럼 산언덕에 사람들이 자주 다니니까 길이 생기다가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니까 길이 막혀서 폐색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도는 사람들이 다니는 일반적인 길과 비슷하면서도 보다 더 미묘하다.
일반적으로 길에 대해서는 현묘(玄妙)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으나 도의 길에서는 그 말을 즐겨 사용한다. ‘현묘’라는 말은 ‘이치나 기예의 경지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함’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도를 현묘하다고 하는 이유는 도를 이용해서 깊이 있는 생각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대개 생각의 깊이도 천박하다.
생각의 깊이가 부족한 사람은 도의 길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의 도는 우리에게 생각의 깊이를 제공해 주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고전을 읽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의 깊이를 일깨워주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고전 읽기의 중요성은 우리를 생각의 깊이가 없는 사람과 그 깊이를 머금고 있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의 깊이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남들에게 쉽게 알리지 않는다. 즉 생각의 마디를 남들이 쉽게 짐작하게끔 너절하게 진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말하면 깊이 있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좋은 고전일수록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진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어렵게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배워서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아는『논어』의 첫 구절이다. 이 구절은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말하기가 간단하지 않다. 이런 것이 고전이 갖는 일반적인 표현의 특징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기로 하자. 노자의『도덕경』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도라고 명명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덕경의 첫 구절은 상당히 철학적이다. 얼핏 보기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가도 막상 그 구절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그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줄 안다. 그런데 삼척동자도 쉽게 구분하는 그 내용을 설명하라고 하면 모두 다 입이 닫혀 말을 못한다. 하늘에는 구름도 있고, 별도 있고 해와 달도 있다. 구름과 해와 달은 다 명사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되지만, ‘있다’의 뜻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으면, 아무도 쉽게 나서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없다’라는 말도 그 의미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순수 존재와 순수 무(無)는 다 같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존재를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순수 존재가 순수 무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양 철학은 오랜 세월동안 존재라는 현상을 존재자와 동일시하는 생각을 당연시해 왔다.
하늘에 있는 구름이나 해와 달 등의 존재현상을 순수하게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저런 순수 존재현상을 다만 순수 존재자 등이 있다는 것으로 대용하는 일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존재가 은폐되고 존재자가 존재 대신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에서 존재는 사라지고 존재자가 대신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존재와 무를 개념으로 사유하기보다 오히려 도(道)로서 주장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존재와 무는 개념적 차원으로서의 명사가 아니라 사유의 차원이 된다. 마치 도가 명사가 아니라 하나의 사유의 깨달음이 되는 것과 유사하다. 존재와 무는 개념적 명사로 환원될 수 없는 정신의 어떤 존재방식이다. 존재와 무와 같은 철학의 사유가 일종의 알음알이의 형태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자가 말한 유가(儒家)의 도, 노자가 말한 도가(道家)의 도도 알음알이 류의 얕은 개념일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 그 속성상 알음알이의 존재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알음알이의 존재방식이란 모든 것에 대하여 그저 개념적 지식만 갖고 있으면서, 자신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그런 태도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개념적 지식, 즉 가벼운 지식만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는 냄새를 피우고 있다가 어떤 사람이 자기 앞에 나타나면, 그는 그 사람을 의식하면서 자기의 지식을 자랑삼아 나열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기가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한다. 그런 사람은 세상사를 오로지 소유의 다과(多寡)로만 평가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로지 겉멋이 들어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만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겉멋에 취해서 사는 사람은 항상 겉멋에 빠져 있기 때문에 겉멋을 사냥하려는 자세만 견지한다. 새로운 겉멋이 나타나면 그는 돌변해서 새로운 겉멋을 놓칠세라 전광석화같이 거기에 달려든다. 쉽게 말하여 겉멋 사냥꾼이 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대학에 비싼 돈을 지출해 가면서 가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단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만을 원하는 것이며, 그것을 파는 곳을 알아서 거기 가서 돈을 주고 사고파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돈으로 사고파는 그런 대상물이 아니다. 겉멋만 잔뜩 든,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만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겉멋으로 아는,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만 갖고 살아가는 것을 권장하거나 유도하는 그런 고전은 단 하나도 없다. 고전은 세상을 앞 못 보는 장님처럼, 맛을 모르는 미맹(味盲)처럼 살지 말 것을 권한다.
맛을 모르는 자가 결코 맛의 진수를 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생의 도를 배워야 한다. 인생은 오로지 도의 길을 통해야만 서로 교감(交感)된다. 도의 교감은 가르치는 사람의 지식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인생의 깊이가 반드시 거기에 작용한다. 그 인생의 깊이는 사지선다형의 문제를 풀이하는 것 같은 자세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사지선다형을 잘 맞히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와 무관한 그런 기술적 교사에 불과하다.
인생의 도는 인생의 깊이에서 온다. 깊이가 있는 사람은 언행이 가볍거나 경박하지 않고, 타인의 선동에 쉽게 동조하거나 좌지우지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균형감각을 찾아간다.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를 산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경박함과 부당함에 대해서는 무심히 대하거나 혹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모든 시대와 문화에는 반드시 그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런 한계를 통찰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내는 힘은 또한 고전의 도(道)에서 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고전의 중요성을 끝없이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이유이다.
<자료 : 김형효 서강대 철학과 석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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